민 경 락연합뉴스 경제부 기자
민 경 락연합뉴스 경제부 기자

과세당국이 매년 발표하는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은 기자들이 관심을 갖는 주요 뉴스 중 하나다.

특히 인기 연예인이 포함되거나 체납액이 눈에 띄게 늘거나 하면 이보다 더 좋은 뉴스는 없다.
사실 나는 그보다는 그에 딸려 나오는 단속 영상에 더 관심이 많다.

문을 뜯고 들어가 고액 체납자와 실랑이를 하면서 꼭꼭 숨겨진 재산을 찾는 영상은 (조금 과장하자면) 그 자체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완전히 갖춘 다큐멘터리다.

고액 체납자의 강한 저항은 스토리의 굴곡을 더해주는 훌륭한 ‘갈등'이 되고 기발한 은닉 수법(가령 소파 등받이에 숨겨둔 1천만원짜리 수표처럼)은 일종의 반전의 카타르시스를 줄 때가 있다.

"이봐요, 아무 것도 없다니까”라는 호언장담 뒤로 쏟아지는 골드바와 돈다발은 기고만장한 단속직원의 표정과 짜증으로 가득 찬 체납자의 목소리와 함께 사이다 같은 ‘엔딩'을 만들어낸다.

매년 비슷한 스토리지만 그럼에도 항상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일반 대중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듯 영화처럼 생경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과세당국이 꺼내놓는 수많은 탈세 사례들은 이렇게 ‘권선징악'의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박탈감을 느끼게도 한다.

대부분의 서민은 그들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벌면서도 ‘탈세'는 상상할 수도 없다. 설사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세법은 ‘넘사벽'이라 그 방법을 쉽게 찾기도 쉽지 않다.

특히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수법의 국제조세 범죄를 보고 있으면 그들의 탈세가 분명한 범법 행위임에도 가끔 ‘능력'처럼 보이는 환각을 느끼기도 한다.

세법을 장식하는 현란한 증여 의제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환각은 한층 더 수위가 높아진다.
세법에 등장하는 ‘의제'라는 단어는 사실 나 같은 세법 초짜에게는 생소한 말이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본다는 뜻이야. 가령 증여 의제라면 증여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증여로 간주한다는 것이지.”

현대 철학 개론서의 한 구절 같은 이 우문우답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증여 의제 중 상당수는 재벌 일가의 재산 승계를 위해 틀어막기 위한 최고 경제 법률 전문가의 ‘절세 전략'과 이를 막으려는 과세당국 간 치열한 싸움의 결과였던 셈이다.

단속 영상에 쾌재를 부르다가도 이쯤 되면 근거 없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한다.

저들이 쏟아붇는 ‘절세' 노력의 100만분의 1도 채 기울이지 않고 있는 나는 너무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연말정산 꿀팁' 기사 몇 개 검색한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뿌듯했던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국세 행정이 필요한 대목은 바로 이 부근 어딘가다.

세액공제와 소득공제조차 잘 모르는 서민들에게 세무서 직원의 친절한 웃음과 따뜻한 한마디는 최고급 세무전문가의 보고서 한 편의 가치가 있다.

세계 최고의 연말정산 간소화 시스템이지만 컴퓨터 사용이 낯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어렵고 복잡하다.

비대면 시스템만큼 일선 세무서의 대면 업무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의미다.

전국 곳곳에 세무서가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것도 이런 역할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국세 행정만큼이나 일선 세무사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난해 말 변호사에게 세무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내용을 삭제한 세무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무려 56년 만의 일이다.

다만 세무사의 입지가 넓어진 만큼 그만큼 책임감도 커졌다는 사실도 함께 주지할 필요가 있다.

세무사법은 세무사에 대해 "공공성을 지닌 세무전문가로서 납세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납세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있는 자'의 권력보다는 ‘없는 자'의 권익 보호에서 보람을 느끼는 세무사들이 더 많아진다면 서민들의 세무 복지 수준도 쑥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새해에는 ‘저들의 주변'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고 상담할 수 있는 세무사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 위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무사신문 제716호(201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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