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영 권 머니투데이 경제부 차장
양 영 권 머니투데이 경제부 차장



지난해 6월, 1년간의 미국 연수 생활이 거의 끝나 가던 때였다. 귀국을 앞두고 우리 가족의 발이 돼 주던 미니 밴을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로 팔았다. 존(John) 이라는 57살 백인 남자가 샀다. 내가 머문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이라는 소도시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버링턴'이라는 시골에 살고 있는 그에게는 20년 넘은 포드 픽업이 따로 있었다. 존은 아내의 1999년식 차가 너무 낡아 내 2007년식 밴을 선물할 거라고 했다.

존은 내가 한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걸 알고 대뜸 트럼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했다.

존은 미국의 대다수 시골 백인 노동자들이 그랬듯 자신도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했다. 트럼프의 기행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존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금이었다. 그는 건축 자재 납품 일을 하고, 텃밭에서 손수 채소를 길러 먹으며 세 자녀를 키웠다. 두 딸은 출가했고 지금은 아내, 중학생 아들과 산다. 아침 일찍부터 낡은 픽업으로 건축자재를 나르며 힘들게 가족을 부양하는데 자신이 낸 세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의료보험만 하더라도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이들이 자기처럼 책임감 있는 사람보다 훨씬 적게 부담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존은 트럼프를 보고 투표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불합리한 것들을 되돌리기 위해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상대 후보'에 투표했다고 했다.

사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인종 우월주의자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특히 불법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을 극도로 싫어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 때문에 만들어진 편견일 공산이 크다. 실제로 존은 가족사진을 보여줬는데 사진 속 다정한 둘째 사위는 히스패닉이었다.

트럼프 현상은 단순한 사회, 정치 현상이 아닌 경제 현상이었다.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에 대한 노동자 계층의 불만이 밑바탕에 있다. 알다시피 트럼프는 최상위층 소득세율 인하 등 ‘감세'를, 클린턴은 부유세 도입과 같은 ‘증세'를 주장했다(실제로 트럼프는 지난해 말 현행 최고 35%인 법인세율을 21%로 대폭 낮추는 등의 초대형 감세를 추진해 통과시켰다).

이처럼 세금이 곧 정치라는 건 인류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명예혁명이나 미국 독립선언, 프랑스 형명은 모두 직접적인 계기는 세금이었다. 한국에서도 부가가치세 도입이 부마항쟁과 박정희 시대의 종말로 이어졌다.

정부는 올해도 ‘증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작년엔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상했고, 올해는 종부세 등 부동산 보유세 인상을 예고했다. 정부는 초고소득자 증세, 초대기업 증세, 부동산 초과다소유자 증세라고 한다. 소득재분배와 양극화 해소를 증세의 이유로 들고 있다.

직접 세금을 내는 당사자만 아니라면 모두 환영할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증세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고민해야 할 게 있다.

첫째는 실제로 상위 1%에게만 부담이 돌아갈 것이냐이다. 조세 부담 전가는 간접세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소득세를 올릴 경우 기업은 대표나 임원들의 세후 소득을 보전해주기 위해서 세전 소득을 더 높일 수 있다. 근로자나 주주에게 돌아갈 파이는 그만큼 줄어든다. 보유세가 인상된다면 부동산 공급이 제한적인 곳에서는 집주인이 전세금이나 월세를 더 올려받으려 할 것이다.

둘째, 어떤 세금은 경제 효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이다.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에서 지적한 내용을 보자. 그는 토지 투기가 산업 불황의 원인이라고 봤다. 지대의 투기적 상승이 생산 중단을 야기하는 정도까지 이르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지대 수익을 세금으로 회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누구보다 ‘효율성'을 중시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누진소득제를 배격했다. 조세 회피가 많아지고 산업발전의 큰 힘이 되는 부의 축적에 대한 유인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일부 여당 정치인들은 헨리 조지를 신봉하며 불로소득인 부동산 보유 이득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야 한다고 하지만 헨리 조지가 토지 외에 다른 것에 부과하는 세금을 모두 없애는 토지단일세를 주장한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그들에겐 소득세와 법인세를 없애고 토지에만 세금을 매기자고 할 배짱이 있나.

더군다나 헨리 조지는 주택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며, 대지와 달리 정치경제학상 ‘토지’의 범주가 아닌 ‘부’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달리 봐야 한다고 했다. 이 역시 토지와 주택을 뭉뚱그려 ‘부동산' 보유세를 인상해야 한다는 이들과 차이가 있다. 헨리 조지를 보유세 도입의 근거로 끌어들이기에 앞서 효율성에 대한 고민을 좀 더 깊게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내가 낸 세금의 혜택이 결국 나한테 돌아온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복지는 사회 안전망이다. 복지를 위한 세금은, 소득이 충분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대비해 내는 보험료 같은 것이다. 복지 국가에서는 개인의 생애 주기를 놓고 보면 결과적으로 평균적인 사람들이 내는 세금과 받는 혜택이 거의 같아야 한다.

증세는 고소득자나 자산가만 싫어할 것 같지만, 사실은 한계선상 바로 위에 위치한 이들이 극도로 민감하다는 것을 트럼프 현상이 보여준다. 경제학은 모든 구성원이 이기적이라는 공리를 바탕으로 한다. 정책은 모든 국민이 박애주의자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펴셔는 안된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선량한 이들이 박탈감을 갖지 않아야 한다.


※ 위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무사신문(20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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