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돈 국민위해 푼다. 내년 429조 슈퍼예산 확정’
‘나랏돈 마중물로 일자리 늘린다. 일자리 예산 12% 증액’
‘문 정부, 사람 중심 소득주도 성장에 나랏돈 푼다’

지난달 29일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하자 주요언론들이 쏟아낸 제목들이다. 많은 언론들이 공통적으로 쓴 단어는 ‘나랏돈’이었다. 그러니까 정부재정은 곧 나랏돈이라는 뜻이다.

정부의 재정이란게 정부가 쓸 수 있는 돈이니까 나라곳간이나 나라살림 살이는 맞다. 그런데 ‘재정=나랏돈’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같다. 나랏돈이라고 하면 국민과는 상관이 없는, 마치 정부가 벌어들여서 국민들에게 배푸는 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정은 나랏돈일 수 없다. ‘시민의 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돈’이다. 경제주체인 개인과 기업이 낸 세금을 모아서 마련한 쌈짓돈이기 때문이다. 소득세와 법인세는 개인과 기업이 경제활동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에서 걷는다. 부가가치세는 이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할 때 발생한다. 갖고 있는 재산을 증여하거나 상속할 때도 세금을 낸다. 그렇게 해서 내년에 걷어들일 국세 총액이 268조원이다. 벌금 과태료 등을 의미하는 국세외 수입이나 기금수입까지 모두 합치면 내년 447조원의 수입이 예상된다. 국세든 국세외 수입이든, 기금이든 돈은 결국 개인과 기업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대통령이나 정부 관료가 해외에 나가서 일을 해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는 이렇게 모은 돈을 내년에 쓰기로 했다. 그게 429조원이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과 기업은 내년에 쓸 돈 447조원을 정부에 위탁한 것이다. 정부는 이 돈을 대한 소유권이 없다. 그래서 사사로이 쓸 수 없다. 시민들이 정부에 준 권한은 돈의 분배권이다. 정부기관은 우리 사회 전체를 조망할 정보력과 분석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일개개인이나 일개기업보다 정말 필요한 곳에 잘 분배할 수 있을 것으로 시민들은 기대한다.

사람마다 가진 생각이 다르다. 돈의 우선순위도 다르다. 기왕이면 내 생각과 맞게 분배가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돈을 배분해 줄 수 있는 권력을 선출한다. 보수 정부라면 성장에, 진보정부라면 복지에 더 많은 돈을 쓸 것이다.

정부가 개인과 기업으로부터 걷은 돈을 운용한다는 점에서 재정을 ‘나라곳간’이나 ‘나라살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재정 자체를 ‘나랏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껄끄럽다.
‘나랏돈’이라는 단어에 시비를 거는 것은 이 표현이 조세저항을 부르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랏돈’에는 더 이상 ‘내 돈’이라는 뜻이 담겨있지 않다. 내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 일방적으로 정부에게 바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 납세를 하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다기 보다 괜히 내 생살을 뜯긴 것 같이 기분 나쁘고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어떡하든 절세(혹은 탈세)를 하는 것인 현명해 보인다. 조세저항은 당연한 권리로 보인다.

‘나랏돈’이라는 표현은 정부가 마음대로 재정을 쓸 수 있는 명분도 된다. 정부는 예산안을 편성해 국회에 심의를 거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은 재정이  제대로 쓰이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재정전문가일지라도 재정이 현장에서 잘 쓰이고 있는 지를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재정은 위정자들의 재산을 불려주는데도 쓰이기도 하고 이들의 파티용으로 쓰기이기도 한다. 자신들의 조직을 키우거나 해외여행경비로 전용되는 될지도 모른다. 혹은 정보기관의 특수활동비가 돼 정치에 개입하거나 정권마음에 들지않는 인사들을 관리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이쯤되면 더 이상 세금 내기가 싫다. 내가 낸 세금이 남의 배를 불리거나, 나를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온다는데 누가 흔쾌히 돈을 낼까. 증세 얘기에 납세자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이유가 있다.

고민끝에 2018년 예산안을 보도하면서 ‘세금 거둔 만큼 되돌려 주겠다’를 제목으로 달았다. 재정이란 나라가 마련한 돈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걷은 돈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따지고 보면 복지예산이란 나랏님이 나랏돈을 국민에 퍼주는 시혜가 아니라 내가 낸 돈을 내가 되돌려 받는 것이다. 다만 가난한 납세자는 적게 내고 많이 되돌려 받는 반면 부자납세자는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소득수준에 따라 되돌려 받는 것의 차이를 두는 것 소득불평등을 줄여 사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국세청 직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세리(稅吏)다. 세리에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짜낸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과거 세금은 나라에 바치는 의무였다. 왕은 국민이 바친 세금을 가지고 왕실을 운영했고 자신의 왕국을 지켰다. 하지만 시민이 주인이 되어 민주적 권력을 선출하는 오늘날 국가에서 과거와 같은 의미로 세금을 볼 수는 없다. 정부는 대통령 일가가 아니라 시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재정은 ‘시민의 돈’이다. 아니 ‘내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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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708호(201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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