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규 민 조선일보 경제부 차장
최 규 민 조선일보 경제부 차장

한승희 국세청장은 틈날 때마다 “정치적인 세무조사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인사청문회 때는 “국세청은 법과 원칙에 따라 세무조사를 한다.

조사목적 외 세무조사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라고 했고, 취임사에서는 “세무조사 절차를 철저히 준수하고 납세자 입장에서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등 세무조사 운영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말뿐 아니라 행동도 뒤따랐다. 외부 기관에서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된 납세자보호위원회를 신설해 부당 세무조사에 대한 구제를 강화했다. 지난 7월 정기인사 때는 올 초 약속한 대로 비정기 세무조사 전담조직인 서울청 조사4국 인력을 8% 가량 축소하기도 했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핵심 조직을 일부라도 도려내는 데는 적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 청장은 조사기획과장, 서울청 조사4국장, 조사국장 등을 차례로 거친 정통 조사통이다.
그런 그가 정치적 세무조사 근절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 국세청장 21명 중 9명이 구속되거나 검찰 수사를 받았다.

대부분 세무조사 권한을 악용해 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 또는 개인 축재 용도로 돈을 뜯어내거나, 정권 실세의 청탁에 따라 세금을 깎아줬다가 문제가 됐다.
모두들 알고 있는 국세청의 어두운 과거다.

지난해 한 청장이 태광실업 세무조사 등 전 정권의 정치적 세무조사에 대해 “중대한 조사권 남용이 있었다”고 고해성사한 데는 이런 어두운 과거와 단절하겠다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 정부에선 정치적 세무조사가 없다”는 한 청장의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누가 봐도 정치적인 의도가 드러나는 세무조사가 한 청장 취임 후에도 적지 않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한항공 자회사인 진에어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가 그렇다. ‘물컵 갑질’ 사건 이후 경찰, 검찰, 관세청, 법무부 이민특수조사대, 공정거래위원회, 교육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등이 달라붙은 한진그룹에 국세청까지 가세해 총 11개 국가기관이 몇 달 째 기업 한 곳을 돌아가며 패고 있다.

먼저 달려든 권력기관들이 총수 일가를 감옥에 집어넣는 데 번번이 실패하자 보다 못한 국세청이 ‘최후의 해결사’로 나선 모양새가 됐다.

다스에 대해 국세청이 1년여 만에 다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도 정치적 이유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타이어에 대한 세무조사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스코에서 반복됐던 ‘세무조사 후 회장 사퇴’ 공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연됐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타격을 받은 소상공인·자영업자를 달래는 데 국세청이 세무조사 유예 카드를 들고 가세한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국세청은 원래 예정돼 있던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를 연기하면서까지 갑작스럽게 자영업자 대책을 발표했다.

실효성과 정당성 양면에서 적지 않은 비판이 쏟아졌다. 납세자연맹은 “세무조사를 유예하는 것은 법의 공정성을 해치고 성실납세자에게는 성실신고의 동기를 낮추게 될 것”이라며 “세무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특혜를 주는 관행은 후진국 행태”라고 했다.

부동산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난 1년간 대대적으로 진행 중인 세무조사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8월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1600여 명을 조사한 국세청은 최근 부동산 관련 탈세 혐의자 360명에 대해 여섯 번째 기획 세무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정책적 목표 달성을 위해 무리하게 세무조사가 동원되면 조사의 효율성은 물론 세무조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진다.

마구잡이로 세무조사의 칼을 휘두른다고 해서 정책적 목표가 달성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정부에서도 부동산 투기조사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대규모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원치 않아도 정권의 의중에 맞춰 세무조사에 나서야 하는 국세청의 고충을 짐작 못할 바는 아니다. “다들 열심히 뛰는데 국세청은 손놓고만 있느냐”고 눈치를 주는데 4대 권력기관 중 하나인 국세청이 가만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영업자 세정지원 대책 발표 때는 대통령이 “자영업자와 상공인의 세 부담 완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즉각 마련하라”고 아예 대놓고 지시했다. 웬만해서는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청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자영업자 대책을 직접 브리핑한 데는 이런 사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국세청은 위에서 거론된 사례들이 정치적 의도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권이 바뀐 후에도 같은 평가를 받게 될까.

사실 “정치적 세무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다. 가깝게는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런 약속을 했다.

영장 없는 세무조사를 제한하고, 특별 세무조사 때 외부 전문가들이 대상 선정의 적합성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집권 초기에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효성을 비롯해 KT&G, CJ E&M 등 ‘미운털’이 박힌 기업들에 대한 표적 조사가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다. 세무조사라는 막강한 권력은 포기하기에 너무 달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세무조사를 제대로 근절하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깊은 고민과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전속고발권을 포기한 것처럼 권한 일부를 내려놓거나, 미국의 국세청 감독위원회 같은 외부 통제기구를 두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정치적 세무조사가 사라져야 국세청의 어두운 과거도 진정한 과거가 된다. 그래야 “정치적 세무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더 이상 필요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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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731호(2018.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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