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역사 속 뒷편에 감춰진 임시정부 독립열사

이달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대한 조직적 항거를 위해 상하이를 기반으로 1919년 4월 11일 설립됐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대미·대중을 비롯한 전 세계 외교활동으로 우리 독립의 당위성을 전파했고 안으로는 독립군 단체를 지원하고 자체 군대인 광복군을 창설하며 독립을 위한 싸움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며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같은 임시정부와 우리 독립의 역사 속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 자신의 생을 바친 위대한 의사(義士)들이 있었다. 하지만 의사들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한 숨겨진 인물도 많다.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위대한 독립투쟁에 함께 했지만 후대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뒷편에 감춰진 인물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일본 황족에게 독검 날린 스물셋 청년, 조명하 의사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께 황족(皇族)의 일원으로 군부 실력자이자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육군 대장이 탄 차가 대만 타이중주(州)도서관 앞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인파 속에서 달려 나와 구니노미야가 탄 차 위로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청년은 구니노미야를 향해 독을 바른 단검으로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곁을 지키던 경호관에게 가로막혔다.
그러자 청년은 손에 쥔 단검을 구니노미야를 향해 힘껏 던졌다. 날아간 단검에 구니노미야는 찰과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듯했지만 이로부터 8개월 만인 이듬해 1월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됐다.
청년은 현장에서 군중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다.
당시 스물셋이던 청년. 그가 바로 한국 독립운동의 ‘4대 의사(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조명하)' 중 한 명으로 손꼽히지만, 그간 우리나라에서조차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조명하(1905∼1928년)다.
조 의사는 이후 타이베이(台北)형무소로 옮겨져 ‘황족 위해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순국했다. 스물셋의 불꽃 같은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 그는 사형 집행 전 “나는 이미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더 남길 말이 없다. 단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적장을 처단하고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박재혁 의사

박재혁 의사는 1920년 김원봉 의열단장의 제안을 받아 의열단에 가입했다.
무역업을 하다 의열단 호출을 받아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같은 해 8월 31일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장을 죽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높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응한 그는 즉시 폭탄 1개와 돈 300원을 수령해 고향 부산으로 왔다.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하고 상하이 서점에서 산 중국 고서 사이에 폭탄을 숨겼다. 일제 형사들 눈을 피하기 위해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들어왔다.
1920년 9월 14일 집무실 안에서 하시모토 서장과 작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상해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거사 후 붙잡힌 그는 고문 취조에도 끝내 단독범을 주장함으로써 당시 함께 투탄을 모의했던 최천택, 김영주, 오재영 등의 석방을 도왔다.
그 후 "왜놈 손에 죽기 싫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사형 집행 전 긴 단식 끝에 1921년 5월 순국했다.
 

아들, 부인까지 나서 대한독립 지원, 피치목사 家

미국 장로회 목사이던 피치는 1870년대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선교 활동에 나섰다. 1910년 자신이 운영하던 서점 ‘협화서국(協和書國)’에서 판매부 주임으로 일했던 몽양 여운형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일제의 지배에 시름하던 한인들의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 후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꾸려지자 피치 목사는 본격적으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아 한인들을 돕는가 하면, 임시정부가 설립한 한인 학교인 인성학교 기금 모집을 위한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에 나선 것이다.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이 미국 총영사관에 피치 목사의 한인 지원 활동을 항의하면서 압박을 가하기도 했지만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한인 지원 활동은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이런 부고 기사가 실렸다.
“우리 한인에 대한 다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우리 독립운동에 대하여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막대한 원조를 여하던(주던) 미국인 피치 목사는 신병으로 인하여 지난 17일 상하이 자택에서 별세하였는데 당년이 78세이더라”
그의 사후 아들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와 부인 제럴딘 피치 여사 역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의 배후로 지목된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군경에 추격당하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는 망설임 없이 김구 선생을 자신의 집에 숨겼다. 이뿐만 아니라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불법적인 체포에 항의하면서 공개적인 석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부인 피치 여사 역시 열정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1942년 3월 뉴욕타임스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기고문을 실어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임시정부 여성의원 7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로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 10일 첫 회의를 열고 개원할 당시 의원은 전원 남성이었다. 각 지방의 대표 자격을 가진 의원은 총 57명. 대개 인구 30만당 의원 1인을 선정하는 것을 기준으로 했지만, 그 원칙이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도에서 각 6인, 강원, 황해도는 3인이 할당됐고, 광복 사업에 참여한 인사들이 많이 거주하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각각 6명, 미국령 지역에 3명이 할당됐다. 인구가 지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긴 했지만, 현재 국회의원 수인 300명의 5분의 1도 안 됐던 것으로 비춰볼 때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는 것은 매우 큰 영예였고, 임시 대통령 선출권 등 권한도 막강했다.
국회의장 산하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정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여성 의원이 처음으로 뽑힌 것은 1922년 2월 8일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였다. 김마리아(1892∼1944) 선생이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된 것. 임시의정원에는 이때부터 1945년 8월 17일 마지막 회의가 폐회할 때까지 김마리아 선생을 포함해 7명(양한나, 최혜순, 방순희, 김효숙, 지경희, 신정완)의 여성 의원이 활동했다.
이들은 힘든 여건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다방면으로 기여했으나 행적이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경희 의사는 사망 연도나 묘소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쓸쓸하게 잊혀졌다.

세무사신문 제745호(20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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