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사와 같은 조세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조세학자들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있는 세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경국대전」에 세법 조항이 있는지, 있다면 누가 만들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세법 조항이 있다고 생각하여도 고작 중국 법을 베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조세학 내지 세무학을 전공하여도 현대 이전의 우리나라 조세 역사에 대한 교육과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의 세법도 복잡하여 이해하고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근대 이전의 세법까지 관심을 갖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조세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문명이 태동되면서 조세는 징수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해 중국의 만리장성, 잉카의 마추픽추 등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문명의 유산이 조세로 이루어 졌다. 우리나라의 경복궁과 수원화성 등 문화유산도 조세로 만들어 진 것이다.
이처럼 조세는 역사 속에서 문명을 형성하면서 변화와 진보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조세의 역사도 중요시해야 한다. 조선시대의 조세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시대 조세를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조세’라고 칭하지도 않고 논리에도 맞지  않는 ‘수취’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깎아내리고 있다. 하지만 비록 잘못된 조세정책과 행정으로 백성에 대한 수탈이 자행되었지만 조선 500년이 이어져 내려 온 것은 조세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조세를 징수하여 군비를 마련해 왜침을 막고,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들의 녹봉을 주었다. 물론 오늘날처럼 철저하게 조세법률주의에 의해 과세되지 않았지만 조세의 근본 기능이 지금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민본(民本)을 으뜸으로 여긴 몇몇 왕과 신료들은 공평한 세법을 만들어 적정한 과세를 시행하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중 가장 위대한 조세정책을 시행한 왕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현대에도 수많은 법 중 세법이 국민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만큼 세법보다 더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법은 없었다. 조세는 백성들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만큼 형벌보다 무서웠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세법을 ‘대법(大法)’이라고 하였다.

세종대왕은 공법(貢法)으로 세법을 개혁하고자 하면서, “지금 대법을 세우고자 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렇게 번거롭게 청하는가(「세종실록」 21년 7월 21일)”라고 하였다. 세종대왕은 건국 초부터 시행하고 있는 세법(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시정하고 공평과세를 위해 논밭에서 거두는 전세(田稅)를 개혁하려 하였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전세 개혁은 공법이란 이름으로 세종 9년부터 세종 2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이루어졌다.

우리가 이른바 ‘전분6등법·연분9등법’이라고 알고 있는 공법이 근 20년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세법을 세우고, 조세의 징수를 그 법에 따라 집행하도록 강하게 명함으로써 조세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세종 18년(1436)에는 오늘날 세법제정특별위원회라 할 수 있는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는 세법을 시험하였지만 반대가 많았다. 이에 세종 25년(1443)에 두 번째 세법제정특별위원회라 할 수 있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른 연분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른 전분6등법을 주요 원칙으로 한 공법을 제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공평한 세법을 만들기 위하여 지금보다 더 민주적으로 대신들과 논의하며 찬부를 묻고,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여론조사를 하였으며,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개정된 세법을 시험하였다. 마침내 세종대왕 26년(1444)에 공법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입법되었다. 그리고 이 공법은 「경국대전」의 「호전(戶田)」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은 오늘날 법의 의미에서 가장 상위법인 헌법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을 만큼 우리나라의 법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법전이다. 「경국대전」은 통일법전으로 민사법과 형사법을 비롯한 세법 등의 다양한 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500년을 지탱하게 한 최고법이다. 「경국대전」은 공법이 입법되고 단계적으로 시행된 지 약 40년 후인 성종 16년(1485)에 최종본이 완성 반포되었지만, 세법이 규정되어 있는 「호전」은 그보다 훨씬 앞선 세조 6년(1460)에 법전 중 첫 번째로 반포 시행되었다.
세종대왕이 만든 공법이 「경국대전」의 「호전」에 규정됨으로써 조선왕조의 최고 세법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경국대전」은 ‘조종성헌존중주의’에 의하여 조선 500년간 국가 통치의 헌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분6등법은 「경국대전」의 「호전」에 수록된 ‘양전(量田)’조에 “모든 전지는 6등급으로 나누며, 20년마다 다시 측량하여 대장을 만들어 호조와 해당 도 및 해당 읍에서 보관한다.”고 규정되어 조선말까지 약 450년 동안 바뀌지 않고 시행되었다.

조선 말인 대한제국 시기에 시행된 광무양전도 전분6등법에 따라 측량되었다. 연분9등법은 「호전」의 ‘수세(收稅)’조에 “생산물이 10분(100%) 충실하면 상상년(上上年)으로 하여 1결에 20말을 거두고, 9분(分)이면 상중년으로 하여 18말을, 8분(分)이면 상하년으로 하여 16말을, 7분(分)이면 중상년으로 하여 14말을, 6분(分)이면 중중년으로 하여 12말을, 5분(分)이면 중하년으로 하여 10말을, 4분(分)이면 하상년으로 하여 8말을, 3분(分)이면 하중년으로 하여 6말을, 2분(分)이면 하하년으로 하여 4말을 각각 거둔다”고 규정되어 약 190년간 시행되다가 1635년(인조 13)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말로 징수하다는 ‘영정법’으로 개정되었다.
결론적으로 세종대왕이 조선 500년의 세법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학계에서는 세종대왕이 입법한 세법 즉, ‘공법’의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세종대왕이 만든 공법을 폄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산업자본을 대표해 개인주의적 법치국가의 이념하에 조세의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절대왕제에 의한 수탈을 방지하여 시민사회를 옹호하고자 하였다.

반면 세종대왕은 양반 관료들의 수탈을 방지하고 백성들에게 공평한 과세를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세종대왕이 만든 공법은 지금의 의미에서는 부족할 수 있겠지만 절대군주 스스로 ‘관리의 재량적인 과세를 제한하고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 하기 위해 만든 세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 공법이 조세사 측면에서 정말 위대한 가치를 가진 업적이라는 생각은 부족하다. 심지어 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들 중 ‘공법’이란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으며, ‘전분6등법·연분9등법’이란 단어조차 몇몇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조선 500년의 기본 세법이 된 세종대왕이 만든 공법에 대해 좀 더 교육하고 연구했으면 한다.

※ 오기수 약력
- 전) 김포대학교 교수
- 전) 한국조세학회 회장

※ 위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무사신문 제759호(2019.11.1.)

저작권자 © 세무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