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의 중립성이란 과세결과 납세자의 상대적인 경제상황에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세종대왕 때에 조세의 중립성이 논의 되었다고 하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세의 중립성이 근대 재정학이 형성된 이후에 나타난 과세원칙이기 때문이다. 조세가 부과되면 조세액만큼 민간부문에서 정부부문으로 자원이 이전된다는 것 이외에도 조세부담액 이상으로 민간부문의 경제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게 되어 이로 인하여 세액 이상의 부담, 즉 초과부담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초과부담은 자산의 보유, 소득의 획득, 재화나 서비스 구입에 대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최적의 상황에서 이탈시키게 된다. 따라서 조세는 초과부담이 영(零)이 되도록 자원배분에 대하여 완전히 중립적으로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조세의 중립성이다. 조세의 부과로 어느 특정 계층이 이득을 보거나 손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세법을 입법하거나 개정할 때 조세의 중립성 원칙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 때 이 조세의 중립성 때문에 초기 세법 개정이 무산되고 새로운 방안들이 논의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논밭의 소득세라 할 수 있는 전세(田稅)를 징수할 때 관리들의 농간과 부정을 배제하는 새로운 세법을 만들기 위해 고대 중국에서 실시한 공법(貢法)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세종대왕은 조부 태조가 만든 세법(답험손실법)의 경우 관리들이 논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부정부패가 자행되자 이를 근절하고자 중국식 공법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중국식 공법은 고대 중국의 하나라에서 실시된 단일정액세율 제도로 본래 매년 똑같은 액수를 거두는 방식이었다. 세종대왕의 생각은 수확량과 상관없이 일정한 면적에서 여러 해를 평균하여 매년 동일한 조세를 징수하게 하여, 관리들이 논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비리를 근절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공무원이 기업체를 찾아가 실시하는 현장 세무조사를 나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를 수 없는 무대면 조세제도를 만드는 것을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여겼다.

세종대왕은 호조로 하여금 공법에 따른 세법 개정안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호조에서는 세종 12년에 ‘1결당 10말(논은 쌀, 밭은 콩)’을 징수하는 공법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중국식 공법을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실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호조에서 올린 이 공법안을 바로 시행하지 않고, 양반관리는 물론 여염집 백성까지 모두 참여하는 여론조사를 실시하게 하였다. 5개월 후 그동안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와 함께 중앙의 조정 대신을 비롯한 지방의 신료들까지 공법의 찬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때 좌의정 황희 등은 “비옥한 전토를 점유하고 있는 자는 거의가 부강한 사람들이며, 척박한 전토를 점거하고 있는 자는 거의가 모두 빈한한 사람들이옵니다. 만약 호조에서 신청한 공법을 시행한다면, 이는 부자에게 행(幸)일 뿐 가난한 자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세종실록?? 12년 8월 10일)”라고 반대하였다.

여기서 ‘부자에게 행(幸) 가난한 자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말은 요즈음의 양극화 현상으로 ‘부익부·빈익빈’의 경제현상이 초래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과 달리 토지의 비척도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단일정액세율의 공법을 시행하면 조세의 중립성이 무너져 부자에게 유리한 과세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즉 수확량과 상관없이 논밭 1결당 10말을 매년 일률적으로 징수하면 비옥한 논밭을 가진 부자는 수확량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조세부담으로 더 부자가 되고, 척박한 논밭을 가진 가난한 사람은 수확량보다 상대적으로 조세부담이 더 커져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공법안이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황희 등은 먼저 전답의 양전(量田, 토지측량)을 철저히 시행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결부법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답험손실법처럼 풍흉에 따라 공평하게 조세를 징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황희 등은 부자에게 유리한 조세의 중립성을 해치는 공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자 집현전 부제학 박서생 등도 “공법은 그 시행에 앞서 먼저 상·중·하 3등으로 전지의 등급을 나누지 않으면, 기름진 땅을 점유한 자는 쌀알이 지천하게 굴러도 적게 거두고, 척박한 땅을 가진 자는 거름을 제대로 주고도 세금마저 부족하건만 반드시 이를 채워 받을 것이니,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그 폐단이 다시 전과 같을 것이오니, 먼저 3등의 <논밭> 등급부터 바로 잡도록 하소서.” 하였다. 황희와 같은 생각으로 황희를 지지한 것이다. 결국 세종대왕은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여 초기에 실시하고자 한 중국식 공법은 폐지되었다.

황희 등이 절대군주시대에 국왕이 추진하는 세법 개혁을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히 왕의 정책을 발목 잡기 위한 것이나 정치의 주체인 양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세의 중립성을 통한 공평과세의 실현이었다. 결국 황희 등의 반대가 세법 개혁의 공평성과 확실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세종대왕은 처음에 제시한 1결에 10말을 징수하는 중국식 공법을 개선하여, 우리가 한국사에서 배웠음직한 ‘전분6등법·연분9등법’의 조석식 공법을 완성하였다. 과거 중국의 한나라와 당나라에서 사용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백성을 위한 조세제도를 혁신적으로 창조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 계층의 한 사람도 피해 보지 않는 공평한 세법을 완성하여, 결부법에 따른 전분6등·연분9등제라는 조선식 공법을 입법하였다. 최종 공법은 1차적으로 조선초부터 시행된 토지 3등급제를 논밭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1결의 면적을 과학적으로 계산하여 과세의 공평과 편의성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2차적으로 면단위(후 군단위)를 기준하여 매년 농사의 풍흉에 따라 등급으로 9개로 나누어, 1결당 4말에서 20말까지 차등적으로 세액을 산정하고 징수하게 하여 공평과세를 실현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꼭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답험손실법과 공법 모두 연부9등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차이점은 답험손실법은 모든 개별 논밭의 수확량을 관리가 직접 현장에 가서 조사하여 9등급으로 나누었지만, 공법은 개별 전답이 아니 광역의 면단위(후 군단위)의 평균 수확량을 수령이 보고하여 조정에서 등급을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연분9등법은 관리가 개별적으로 논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공법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최종 공법은 세종 26년(1444)에 완성되었는데 세종대왕이 황희와 세법의 논의를 시작한지 15년만이다.

이처럼 세종대왕 때 황희를 비롯한 신료들은 지금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경제적 지식을 가지고 양반중심의 정치가 아닌 진정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 했기 때문에 조선 최고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본다.

※ 오기수 약력
- 전) 김포대학교 교수
- 전) 한국조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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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760호(20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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