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판단한 다음 기자들에게 말해 줍니다. 그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배웠거든요.”
몇 년 전 A 교수의 입에서 ‘지식인의 의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무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지식인의 의무, 배운 사람의 책무. 아직도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식인’과 ‘의무’와 같이 중요한 말을 얼마나 오래 잊고 있었는지 새삼스레 되돌아봤다.
A 교수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 매체에 자주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다.
사회 각종 분야에 대한 코멘트를 해 준다. 워낙 박학다식한 만큼 그가 쏟아내는 말은 국가의 품격에서 강도범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그는 어떤 전화도 피하지 않았고, 자기가 아는 만큼 대답했다.
얼핏 생각하면 “언론에 이름을 자주 내 유명세를 타려는 것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잦은 언론 코멘트를 하는 이유는 명예욕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공헌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의 B 대학은 “배운 만큼 사회에 다시 되돌려주라”는 학풍(學風)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B 대학을 졸업한 교수들이 다른 대학에서 유학한 교수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답변에 나선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A 교수가 어려운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회적 논란이 되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토대로 판단한 내용을 사회 공기(公器)인 언론에 설명하는 행동 자체가 일종의 사회공헌 활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전공자인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과 분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배운 사람의 책무’라는 것이 A 교수의 지론이었다.
아쉽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런 생각을 지닌 지식인은 많지 않은 듯하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어 보면 “바쁘다”거나, 전공 분야임에도 “나는 모른다”는 이유로 답변을 회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확연하게 갈리는 사안이라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갈등이 심한 분야일수록 국민들이 전문가 사이의 보편적인 상식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면 공동체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의 생각이 퍼지지 않는 틈새를 비전문가가 파고들고, 잘못된 사실이 마치 진실인 양 유포되는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목격해 왔다.
세무 분야에서도 국민 여론의 향배를 결정하는 데 전문가 의견이 중요한 경우가 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 10일 국회에서 열린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를 들 수 있다.
인사 청문회 때마다 후보자의 증여 및 상속 행위가 ‘탈세’인지 ‘절세’인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유독 그 논쟁이 뜨거웠다.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면 사안은 간단하다.
홍 후보자의 장모가 미성년자인 후보자의 딸에게 자신이 가진 빌딩 지분 4분의 1을 증여했고, 후보자의 부인이 딸에게 증여세를 납부하기 위한 용도로 2억2000만원을 빌려 줬다. 이 과정에서 차용증을 작성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놓고 국세청을 포함한 세정 당국이나 일선 세무사들에게 “법에 저촉되는 사안인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실제로 세제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홍 후보자의 증여의 합법성 여부는 거의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다.
세무 분야는 납세자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국세기본법 준수 등의 이유로 ‘지식인의 의무’를 다하기 어려운 곳이다.
또, 장관후보자 청문회가 법의 영역보다 정치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에 개인 의견을 개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세무 전문가들의 의견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으면서 비슷한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흙탕물 같은 정쟁(政爭)만 반복되고 있다.
정쟁이 벌어지는 동안 사실 검증은 이뤄지지 않아 결국 낙마한 장관이 실제로 탈세를 한 것인지 여부는 누구도 모르게 된다.
청문회에서 나온 절세(혹은 탈세) 방식을 따라하는 사람들까지 생긴다.
전문가 집단인 세무사와 이를 보도하는 언론 모두 한번쯤 청문회 탈세 검증 방식을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일이다.
만약 개인이 의견을 내기 어렵다면 단체 차원에서 나서 ‘전문가의 책무’를 실천하는 건 어떨까.
한국의 세무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한국세무사회다.
세금과 관련해 편법을 넘어 불법을 저지르는 후보를 판별하는 눈도 세무사회가 가장 정확하게 지니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정당한 세무 활동이 불법으로 호도되는 경우를 막을 수도 있다.
세무사회가 본 지면이 인쇄되는 세무사신문에 사설 형태로 각종 탈세논란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것도 우리 사회에 건강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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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712호(2017.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