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증권사, 과세 당국 상대 소송 5건 모두 2심에서 승소

수사당국의 수사나 금감원 검사,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차명계좌임이 드러난 경우 그 안에 든 자산을 '비실명 금융자산'으로 보고 고율의 세금을 물리기로 한 금융당국의 해석이 법원에서 뒤집혔다.

서울고법 행정9부(김시철 이경훈 송민경 부장판사)는 23일 시중 은행 5곳과 증권사 1곳이 지방세무서장을 상대로 제기한 소득세 징수 취소 소송과 법인세 징수 취소 소송 총 5건을 모두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법(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5조에 따르면 실명에 의하지 않고 거래한 금융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자와 배당소득에는 소득세 90%(지방소득세를 포함하면 99%) 원천징수하게 돼 있다.

당초 금융위원회는 차명계좌라도 명의인 실명계좌면 이 계좌에 보유한 금융자산은 실명 재산이라고 포괄적으로 해석해왔으나 2017년 종전과 다른 해석을 내놨다.

금융위는 국회의 국정감사가 진행 중이던 당시 보도자료를 내 "사후적 객관적 증거에 의해 확인돼 금융기관이 차명계좌임을 알 수 있는 경우, 즉 검찰 수사나 국세청 조사, 금감원 검사로 밝혀진 차명계좌는 금융실명법 5조의 차등 과세 대상"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해석에 따라 과세 당국은 2018년 이후 금융사들에 각 차명계좌의 금융자산에서 발생한 이자·배당 소득에 90%의 소득세 또는 법인세를 원천징수한다고 통보했고, 금융사들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다.

총 다섯 건으로 진행된 소송에서 1심은 대부분 금융사의 손을 들어줬으나 한 증권사가 낸 소송에서는 과세 당국이 승소하는 등 판결이 엇갈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조세법률주의가 요구하는 엄격해석의 원칙에 비춰 각 계좌의 금융자산이 비실명 금융자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모든 소송을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엄격해석의 원칙이란 조세 법규를 유추하거나 확장 해석해 납세 의무를 확대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재판부는 "피고(과세 당국)의 주장에 의하면 종중·동문회 등의 총무가 회비를 자신의 계좌로 관리하는 경우, 배우자가 생활비에 쓸 목적으로 상대 배우자의 급여 계좌를 관리하는 경우, 보이스피싱에 속아 제3자의 계좌에 송금한 경우 등 불법적 목적 없이 이뤄지는 차명계좌도 차등 세율이 적용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비실명 금융자산이라는 이유로 법인세를 부과한 것은 금융실명법상 근거가 없다고도 덧붙였다.

이번에 판결이 선고된 다섯 건의 소송 중 세 건은 소득세, 두 건은 법인세를 둘러싼 소송이었다. 법인세 소송 두 건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소유주로 지목된 자동차 부품회사 다스가 차명으로 보유한 계좌를 두고 제기됐다.

한편 금융 당국이 2017년 비실명 금융자산의 기준 해석을 변경한 것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에 차등 세율 90%를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시 국감에서 이 회장이 2008년 삼성 특검에서 확인된 차명계좌를 실명계좌로 전환하지 않아 세금과 과징금을 회피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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