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사업장 두고 단순업무 사무소인 척' 세금 회피한 다국적기업
국세청, 역외탈세 혐의자 44명 세무조사 착수

해외에 아무런 기능이 없는 '허수아비' 법인과 비밀계좌를 만드는 방식으로 자녀에게 현지 고가 아파트 취득 자금 등 거액을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증여한 유명 식품기업 창업주가 적발됐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국내 고정사업장을 단순 연락사무소 등으로 위장한 다국적기업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세청은 국제 거래를 이용해 재산을 불리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자산가나 고의로 세금을 회피한 다국적기업 등 역외탈세 혐의자 44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22일 밝혔다.'

 

◇ 해외에 '무늬만' 법인 만들어 자녀에게 돈 빼돌려
국내 유명 식품기업 창업주 A는 해외에 거주하는 자녀 B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현지에 아무런 사업기능이 없는 명목상의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A는 기업 내부거래를 통해 현지법인에 빼돌린 돈으로 현지에서 부동산을 사고팔아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이를 B에게 현금 증여해 비밀계좌로 관리했다.

B는 이 돈으로 현지 유명학군의 고가 아파트를 매입해 거주하고 고액의 교육비도 지출했다.

A와 B 모두 해외부동산 양도나 현금 증여, 해외금융계좌 보유 등을 전혀 신고하지 않아 세금은 내지 않았다.

수백억 원대 자산이 있는 소프트웨어(SW) 제작·개발기업 사주 C는 직원 명의로 조세회피처에 '꼭두각시' 법인을 설립했다.

이 법인은 C의 지시에 따라 현지법인에 컨설팅 비용 등의 명목으로 거액을 송금하고 법인자금도 대여했다.

C는 이후 현지법인을 임의 청산해 자신의 회사에 손해를 입힌 뒤, 현지법인의 자금은 신고 없이 해외 계좌에서 비자금으로 관리하며 주식 투자에 썼다.

식음료 기업 사주 D는 해외에 이름뿐인 현지법인을 설립해 운영비 명목으로 자금을 보내며 '비밀 지갑'처럼 썼다.

이 자금은 현지에서 식료품 기업을 운영 중인 D의 자녀 E가 받아 사업자금과 부동산 취득 자금으로 썼다.

D는 또 배우자와 친인척 명의를 빌려 E에게 개인 이전거래 등의 명목으로 수년간 사업자금을 송금하고 증여세 신고를 누락했다.

세 사례 모두 10여 년간 지속적으로 탈세가 이뤄졌으며, 탈루 추정금액은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른다고 국세청은 설명했다.

국세청은 이처럼 현지법인 등을 이용한 자산가의 '부자 탈세' 사례에 해당하는 21명을 확인해 조사할 방침이다.

21명 중 1명은 재산이 500억원 이상이고 2명은 300억원 이상, 3명은 100억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세청은 현지법인을 이용한 탈세 수법이 과거에는 일회성 '소극적 재산 은닉'에 그쳤다면, 최근에는 '적극적 자금 세탁'과 자녀 상속·증여 목적으로 장기간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 법인세 안 내려고 고정사업장 숨긴 다국적기업도 적발
글로벌 장비업체 F사는 국내 고객사와 제품·솔루션을 공급하는 계약을 형식적으로 체결하고, 국내 자회사가 고객사에 제품 사용 설명 등 단순 판매 지원용역만 제공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회사에 모회사 임원을 파견해 고객 관리, 판매, 애프터서비스(A/S), 리스크 관리 등을 모두 수행하게 했다. 사실상 국내에 고정사업장을 둔 것이다.

비거주자나 외국 법인이 국내에 고정사업장이 있으면 사업장과 관련한 모든 소득을 합산해 다른 내국법인처럼 법인세 등을 신고해 납부해야 한다.

F사는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고정사업장을 둔 사실을 숨기고 자회사의 단순 지원용역과 관련한 최소한의 소득만 신고했다.
글로벌 건설기업 G사도 국내 고객사와 건설용역 제공 계약을 맺고 국내 현장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다수의 임직원을 파견했다.

G사는 6개월 이상 국내에서 사업을 수행했지만, 설계·제작, 설치, 감독, A/S 등 거래 단계별로 사업 활동을 쪼개 고정사업장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법인세 신고를 누락했다.

국세청의 이번 역외탈세 혐의자 조사 대상에는 이처럼 국내 고정사업장을 숨겨 세금을 회피한 다국적기업 13개가 포함됐다.

국세청은 또 불공정한 자본거래 등으로 법인자금을 빼돌린 법인 10개도 조사 대상에 올렸다.

이 중 정보기술(IT) 기업 H사는 중국 현지법인을 세우면서 조세회피처 법인이 이 법인을 지배하는 형식으로 투자구조를 복잡하게 설계한 뒤, 현지법인을 청산하고 투자액을 전액 손실 처리하면서 실제로는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사주 비자금을 만들었다.

김동일 조사국장은 "역외탈세는 탈세 전 과정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기획돼 계획적으로 실행되는 반사회적 행위"라며 "조사역량을 집중해 끝까지 추적해 과세하고, 디지털세 논의 등 다국적기업 조세회피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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