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파기환송…검찰, 입증 책임 더 무거워질 듯

전임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서부터 현 정부 들어 발생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감찰무마 의혹 사건에 이르기까지 검찰이 권력형 비리 의혹에 적용했던 직권남용 법리를 놓고 대법원이 엄격한 잣대를 제시했다.

형법 123조에 규정된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하급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을 때 성립하는 범죄다.

대법원은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이 맞는지를 까다롭게 살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 선고에서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국정농단 사건의 한 갈래로 여겨진 이 사건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 전 실장 등이 문화예술위원회 등 산하기관 임직원을 시켜 몇몇 문화예술인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배제하도록 했다는 것이 공소사실의 뼈대를 이룬다.

그간 하급심은 김 전 실장 등이 특정 문화예술인에 대한 정부 지원 배제를 지시한 것이 직권을 남용한 것인지를 주로 심리했다고 대법원은 봤다.

그러나 김 전 실장 등이 산하기관 임직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인지까지도 정확하게 따지지 않았다고 보고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김 전 실장 등의 공소사실 중에는 그가 산하기관 임직원에게 각종 명단을 보내게 하거나 지원금 관련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한 행위도 직권남용 혐의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런 행위가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인지를 더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 취지다.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다른 공무원, 부서 또는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것이 통상적"이라며 "이러한 관계에서 요청을 듣고 협조하는 행위를 법령상 '의무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단은 향후 검찰의 권력형 비리 수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전임 정부에서부터 최근까지 정권의 핵심 인사가 행정과 인사, 감찰 등 각종 권한을 남용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검찰은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수사를 해 왔는데, 사법부의 유무죄 판단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건뿐 아니라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 사건 등은 모두 검찰이 직권남용이라는 법리를 적용해 수사한 사건들이다.

검찰은 이 사건들의 공소유지뿐 아니라 향후 유사한 사건을 수사할 때도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관측된다.

권력을 지닌 특정 인사가 권한을 남용한 정황이 있더라도, 그의 지시를 받은 공무원이 '의무 없는 일'을 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어야 '성공한 수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급자의 권한 남용이 있더라도 지시를 받은 공무원의 행위가 법령에 어긋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상급자를 재판에 넘기더라도 유죄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만큼 검찰은 더욱 촘촘한 수사를 벌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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