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 기업문화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근로시간 단축, 야근 방지, 다양한 휴가 등으로 일·가정의 양립을 돕는 추세다.


전에는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거나, 휴일에도 일하는 직원을 선호했다. 하지만 요즘은 직원을 제대로 쉬게 해야 생산성과 창의성이 올라간다고 여기는 기업이 많다. 그럼에도 근로시간 단축은 소규모 신생 벤처회사에서나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들 기업의 사고가 유연하기 때문이지만, 연봉·복지가 열악한 대신 주35시간 근무, 주4일 출근, 파격적인 휴가 등으로 인재를 유치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국내 대기업 중 최초로 임금 하락 없이 근로시간을 단축한 곳이 등장했다. 신세계그룹이 1월 1일부터 법정 근로시간(주40시간)보다 5시간 적은 주35시간 근무제를 시행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며, 8~4시, 10~6시 출퇴근도 가능하다.

이에 따라 이마트 점포는 폐점 시간을 자정에서 오후 11시로 1시간 당겼다. 사무직의 경우는 오후 5시에 퇴근 안내방송이 나오고, 오후 5시 반이 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져 이튿날 6시에 켜지는 ‘PC 셧다운제’를 도입했다. 담당 임원의 결재를 받으면 컴퓨터를 계속 쓸 수 있지만, 부서장에게 경고장이 날아오는 등 인사 평가에 불이익이 따른다.

직원들은 주35시간 근무를 반긴다. 한 직원은 “전에는 8시가 넘어 퇴근했는데, 요즘은 5시에 퇴근해 아이들과 어울리며 삶의 질이 향상됐다”고 좋아했다. 또 다른 직원은 “5시에 퇴근하니 학원에 가거나 운동을 하는 등 여유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그밖에도 최근 대형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일·가정의 양립에 부쩍 공을 들이는 분위기다. 롯데그룹은 지난해에 일부 계열사가 운영했던 ‘PC 오프’ 제도를 올해부터 모든 계열사로 확대했다. 이는 오후 6시 30분 이후 및 휴일에 회사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제도다. 빠른 출근을 막기 위해 컴퓨터가 다음날 오전 8시 30분에 켜지는 ‘PC 온’ 제도를 도입한 계열사도 있다.

현대백화점그룹과 GS리테일은 ‘2시간 휴가제’를 도입했다. 하루에 2시간씩 4번을 쉬면 연차가 하루 소진되는 제도다. 직원들은 갑자기 가족을 돌봐야 하거나 병원 진료 등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이 제도를 활용한다.

재계 안팎에서는 유통업계에서 촉발된 근로시간 단축 움직임의 영향을 예의주시한다. 취지엔 공감하지만 생산성 하락, 비용 상승 등으로 이어질까 봐 우려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근로시간을 단축한 기업들은 노사가 합의하고 시행할 경우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얘기한다. 직원들의 만족도와 몰입도가 높아져 생산성이 오른다는 평가가 많다.

신세계그룹만 해도 근로시간 단축 후 전에 없던 풍경이 생겨났다. 예컨대 점심시간에는 사내식당의 줄이 길어졌다. 빨리 먹고 일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탓이다. 또 생산성 하락에 대비해 만든 오전·오후 각각 2시간의 집중 근무시간은 무용지물에 가까워졌다. 자발적으로 온종일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장시간 근로문화를 개선하면 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근로시간이 길수록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가 2016년에 발표한 ‘한국기업의 조직건강도와 기업문화’ 조사에서는 잦은 야근이 한국 기업의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요소로 지목됐다.

국내 기업 100곳의 직장인 4만여 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43%는 주5일 중 3일 이상을 야근했다. 하지만 일평균 11시간 30분을 근무한 직원의 생산성은 전체 근무시간의 45%였고, 일평균 9시간 50분을 일한 직원은 57%로 나타나 야근이 많을수록 생산성은 떨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나아가 앞으로는 기업이 워라밸에 신경 쓰지 않으면 인재를 유치하기도 힘들 전망이다. 얼마 전 취업 포털 사람인이 ‘입사 희망 기업의 조건’을 조사한 결과, “연봉은 중간이지만 야근이 적은 기업”(65.5%)을 선호하는 비율이 “연봉은 높지만 야근이 잦은 기업”(11.8%)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또 통계청의 ‘2017 일·가정 양립 지표’에서는 “일이 우선”이란 응답이 2015년 53.7%에서 2017년 43.1%로 줄었고, “가정이 우선”이란 응답은 11.9%에서 13.9%로 늘었다. 이런 변화를 볼 때 앞으로 기업들의 근로시간 단축 움직임은 퍼질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김난도 교수는 “특히 20~30대에 많은 워라밸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자신의 삶을 무조건 희생하지 않는다”며 “조만간 사회의 주역이 될 이들의 성향을 기업이 무시하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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